해방신학은 가톨릭 교리에 반한다.
거대한 거짓: 사회주의에 관한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회..
투자와 공동선 Investment and the Commo..
성모마리아님

Pope proposes serenity of Mary..
On The Unfolding of God's Self..
Pope Says Liturgical Abuses De..

종북(從北)구조의 본질과 수술법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이사장 문재인)'
서울수복 기념식에 불참한 골수좌익분자 박원순 서울시장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복거일
삼성경제연구소
임광규..


글번호  2 ,  (IP:221.151.***.***) 추천/ 반대  0 / 0 ,  (조회:5241)
이름  김태우 미카엘(삼성동 성당) 날 짜  2006/02/03 (16:01)
 중국 전교여행을 회상하며
2005년 8월 8-13일간 6박7일의 중국 전교여행은 나의 신앙생활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직장에서 제공하는 하기휴가를 몽땅 털어야 했기에 망설임도 많았지만 여행을 마칠 무렵 가슴은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했다. 전교여행은「중국선교와 탈북자를 위한 기도회(회장 김현욱 돈보스코)」가 주최한 것으로서 ‘작정된 고행길’이었다. 시간을 쪼개느라고 주로 밤 시간을 이용하여 이동했는데, 통화에서 이도백하까지 탄 밤열차는 3층 침대칸에 입석자들까지 와글대는 ‘아우스비츠행 열차’였다.

우리 일행은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학업지인 장춘의 소팔가자 마을에서 1박을 한 뒤 국내성과 백두산을 거쳐 연길, 용정, 화룡, 괴산툰, 도문 등 두만강 접경지역의 조선족 마을들을 방문했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현대문명과 괴리된 상태에서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1960년대 한국의 시골을 연상하게 하는 화장실은 단연 압권이었다. 하지만 재래식 화장실도 찌는 무더위도 우리 일행의 강행군을 늦추지는 못했다. 가는 곳마다 감동과 감격이 서렸다. 성당과 성소들이 있었고, 그들 또한 내가 모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들과 함께 부른 성가합창이나 봉헌한 안수기도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공산주의 체제인 중국에서 미사가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물론 옥외에서의 예배의식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고구려 유적지인 환도산성과 백두산 장백폭포 아래서 가이드를 보초(?)로 세워두고 봉헌한 미사는 더욱 잊을 수 없다.


김대건ㆍ 최양업 신부의 족적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피로 얼룩진 한국천주교의 순교사를 좀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행에는 마천동 성당의 이종남 신부, 수원교구의 유민구 신부, 배론성지의 여진천 신부 등 세 분의 사제가 동행했고, 특히 여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학자사제이시다. 우리는 이분들로부터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8세기 조선의 천주교회는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권철신(1736-1801), 이벽(1754-1786), 이승훈(1756 -1801), 윤유일(1760- 1795) 등을 주축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윤유일은 조선에 사제를 모셔오기 위해 북경을 드나들었고, 결국 중국인 주문모(1752-1801) 신부가 1794년 조선땅을 밟지만 1801년 순교하고 만다. 사제를 모셔오기 위한 노력은 정하상(1795-1839)에게 계승되어 중국인 및 프랑스인 사제들이 들어오게 된다. 정하상은 윤유일과 함께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로서 조선인 신부를 양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정하상은 세 명의 소년을 예비사제로 선발하여 중국으로 보낸 후 관헌에 체포되어 처형된다. 그 소년 중 한 분이 김대건(1821-1846)이었고 다른 한분이 최양업(1821- 1861)이었다.

김대건은 순교자 아버지 김재준의 아들로 1836년 15세의 나이로 정하상이 모셔온 프랑스인 신부 모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박해 아래서 조선의 천주교를 이어가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김대건은 사제교육을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과 마카오를 드나들었고, 1843년 4월부터 장춘에 있는 소팔가자에서 최양업과 함께 페레올 신부 아래서 2년간 신학공부를 한다. 김대건은 1845년 상해 근처의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0월 조선으로 밀입국한다. 이후 전국의 공소들을 돌면서 고백성사와 세례성사를 거행하고 신자들을 모았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마포를 떠나지만 6월 5일 관헌에 체포되어 해주 감영에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3개월 동안 수십 차례의 문초를 받았지만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추상같은 말씀을 남긴 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당한다. 망나니들이 그분의 목을 내려쳤고 여덟 번째의 칼을 맞고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다가 40일 후 이민석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사목생활은 반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불꽃같은 선교활동으로 조선땅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그리고 1984년에는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피의 순교’와 ‘땀의 순교’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를 통해 죽기까지 봉사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신 분이라면,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조선인 신부로서 땀의 순교를 통해 죽기까지 봉사하신 분이다. 최양업은 충청도 청양의 천주교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모친은 1839년 박해 중에 순교했다.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 필립핀 등을 드나들면서 신학을 공부했다. 1842년부터는 김대건과 함께 소팔가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이후 조선을 드나들면서 목숨을 건 전교활동을 계속했고, 1849년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사제로 수품되었다. 이후 11년간 최양업 신부는 하루에 백리길을 걸으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조선의 산간오지들을 누볐다. 그러는 동안 번역, 저술, 자료수집 등을 통해 조선 천주교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스스로 순종과 인내를 실천했다. 최양업 신부는 40세가 되던 1861년 6월 15일 피로에 치친 몸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문경의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그분의 시신은 그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에 프르티에 신부에 의해 강원도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래서 소팔가자는 더욱 감명적인 곳이었다. 김대건 성지로 가는 길은 김현욱 회장의 모금활동으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고, 역시 모금으로 건립한 ‘김대건로’라는 도로명을 새긴 비석과 김대건 기념관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소팔가자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지만 90%가 카톨릭 신자라고 한다. 그래서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족적을 뭉클하게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손에 성가책을 든 주민들이 삼삼오오 몰려왔다. 조그맣고 새카만 아이들로 구성된 어린이 성가단이 무반주로 부르던 성가는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대하며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담고 돌아왔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조선족 동포의 성소를 찾아 함께 올린 미사와 기도회도 주옥같은 추억이 되었지만, 중국 땅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유지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한국인 선교자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가슴 저미는 숙연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가 보여주신 피의 순교와 최양업 신부가 솔선하신 땀의 순교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 최대의 수확이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한국 천주교의 숨결을 이어간 순교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 대한 죄책감도 몰려왔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댓글 달기
로그인을 하셔야만 댓글에 글을 쓰실 수 있습니다.
* 이 름 * 멘 트  
* 비밀번호

양홍준 김태우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중국의 천주교회는 중국 공산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애국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활동한다 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새로운 전교는 허락않고 기존 신자들의 신앙활동만 허가한다고 하는데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좀더 자세히 써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2006-02-11 오전 9:12:)
 
전세원 양홍준님!
제가 다녀온후기를 여기에 올릴려고하니
안됩니다
카페에 올렸으니 조만간 조치가 있을것 같습니다
관심주셔서 감사합니다
  (2006-03-08 오전 2:00:)
 
조안나 † 찬미 예수님~! 미카엘 님!

오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구글에서 검색하다가..
《광야의 소리》에서 닻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제가 머무는 인터넷바다의 주소는
http://cafe.daum.net/Coreansanctus
[103위 한국순교성인] 다움 카페입니다.

미카엘 님의 윗글을 음악에 실어서..큼지막한 글씨체로
옮겨놓고 싶은데...괜찮으시겠지는지요?

저도 또한 시복시성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랍니다.
만나뵙게 되어서..반갑습니다. 그럼, 틈나는데로 다시
들려서 허락을 받고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오시면서 뜨거웠던 감동이 오래오래 머물기를..
하느님의 평화를 가득히 빕니다. 샬롬~!
  (2007-08-04 오전 6:34:)
 

원수를 사랑 하여라~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려 오..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
하느님은 존재 하시는가?
글이 없습니다.
중국 전교여행을 회상하며
원수를 사랑 하여라~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려 오..
하느님은 존재 하시는가?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