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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사회참여 이대로 좋은가?
박상증 박효종 대담, 4대강 등 종교계참여의 비판
연합뉴스  
 

박상증 목사 소개

1960∼80년대 국내 1세대 에큐메니컬 운동가이자 전 세계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국내 인사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간사,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 원장을 역임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참여연대 공동대표(10년 재직)를 거쳐 지금은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효종 교수 소개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서 학사, 석사(신학)를 받고, 후에 서울대학교 교육학 석사를 취득한 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바른사회시민회의와 교과서포럼 공동대표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성희 교수 (이하 사회자) :

오늘 대담의 주제는 종교의 사회참여입니다. 짧은 시간에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편의상 3가지 주제로 나누어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첫 번째는 종교가 사회에 참여하게 된 신학적인 배경이나 이론을 짚어주시고, 두 번째는 한국 현대사에서 종교의 사회참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민주화에 기여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진단을 내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세 번째로 4대강 사업이나 북한의 인권 문제 등, 현안이 되고 있는 종교의 사회참여 이슈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고견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종교의 사회참여라는 개념에 대한 신학적인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상증 목사:

예전에 팍스로마나의 지도신부인 라(羅)신부 사무실에 갈 일이 있어 갔었습니다. 그때 사무실 서재에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적인 신학서적이 서재에 다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미국에서 신학공부하고 돌아온 입장이지만 가톨릭 신학 공부를 그다지 많이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사람들의 교육이 개신교 교육보다 철저한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초기 100년 역사를 박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역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숨어서 믿는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굉장히 어렵게 예수를 믿었지만, 그만큼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효종 교수:

교회와 사회의 관계, 혹은 교회와 정치와의 관계는 특히 가톨릭의 역사가 개신교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로마시대부터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후 거의 300년이 흘러 313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공인을 하게 됩니다. 이제 명실공히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것이죠. 이전에는 순교자의 역사로 일관했었는데, 밀라노 칙령후에는 오히려 완전히 반대상황이 되서 국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되었고, ‘정교일치’가 되었습니다.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도 정교일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참여라는 표현을 사용할 경우는 “정치와 교회는 일체다”라고 하는 정교일치의 상황이 아니라 교회와 정치제도는 독립적인 실체로 볼 때의 상호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의 역사로 볼 때도 교회와 국가, 교회와 사회는 별개의 것이 되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추세였습니다. 유럽에서 최대의 종교전쟁이고 최후의 종교전쟁으로 꼽히는 신구교간의 ‘30년 전쟁’ 이후 국가공동체가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개신교나 구교와 같은 종교들이 공존을 하면서 ‘정교분리’쪽에 힘이 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종교의 사회참여, 정치참여를 말할 수 있겠는데, 현대에 들어오면서 현저한 사례가 있죠.

 

독일의 나치시대에는 개신교의 훌륭한 목사님, 예를 들면 본회퍼(Bonhoeffer)와 같은 분들이 나치제국을 종결시키는 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되는 사태도 있었습니다. 정교분리의 상황에서는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된다", 즉 라틴어로 “엑끌레시아 따체아트(ecclesia taceat)”라는 경구가 원칙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치시대 이후 국가가 저지르는 심대한 악이나 사회의 뿌리깊은 ‘거악(巨惡)’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교정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쪽에서도 남미의 많은 독재자들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반인륜적인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상황에서 ‘해방신학’이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남미 해방신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구스타브 구티에레즈 신부는 마르크시즘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분석틀을 받아들인다는 논리로 억압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교회가 나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가톨릭에서 교회의 사회참여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해방신학자들을 많이 거론하게 됐습니다.

 

사회자 :

종교와 사회는 정교일치에서 정교분리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과 성숙을 거듭해 온 것이군요. 신학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하고 이젠 우리나라의 상황에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지요. 우리 근현대사에서 종교의 사회참여가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 산 증인이신 박상증 목사님께서 그 의미와 성과에 대해 말씀 해주십시오.

 

박상증 목사:

그 뿌리를 찾기는 어렵지만 개신교의 세계선교라고 하면 주로 18세기부터라고 합니다. 독일의 30년 전쟁 이후에 독일 개신교에서 일어났던 경건주의가 유럽에서 세계 선교운동의 본론적인 촉발 역할을 했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같은 이들이 영향을 받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고자 했었습니다. 결국 경건주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개신교, 프로테스텐타와 카톨릭이 피흘리는 싸움을 했던 30년 전쟁에 대한 반성입니다. 가톨릭의 세계 선교 전략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개신교의 반란이 일어난 이후 일종의 위협을 느낀 가톨릭교회가 세계 전략에 나서는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100년이 넘었습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선교사로서 들어오기 이전에 벌써 만주를 통해서 성경번역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기독교 전도자들이 왕래했었습니다. 그때 그런 사람들이 가톨릭이 그 전에 100년 동안 한국에서 고생을 한 것에 대해서 의식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별로 대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프로테스텐타는 프로테스텐타로서 가톨릭 상관없이 우리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결국 다른 나라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 짓고, 고아원 만들고, 병원 짓고 하면서 사회봉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항상 문제를 느낀 것이 자기가 선교하러 온 나라의 위정자와 정부와의 관계였습니다. 이조 말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할 때 일본 세력 하에 있어 호스트 거번먼트와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장 어려운 점이 나라가 없어지면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제지해야 할 것이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개신교의 초기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사회참여라는 것은 계몽과 교육, 의료 같은 사회사업이었습니다. 사람사업이죠.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디아꼬니아(diakonia), 봉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디아꼬니아라는 말도 최근에 신학자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 당시에는 그와 같은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선행을 한다, 좋은 일 한다.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 그런 의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한 가지 주장한 것이 평등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평등 사회가 아니잖습니까? 평등사상을 주장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소위 하류층의 사람들이 기독교에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들어오긴 했는데 기독교가 요구하는 윤리규정이 너무 엄격하니까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이탈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등사상이라고 하는 사상을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있어서 기독교가 크게 공헌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역할은 공산주의가 했다고 나는 봅니다.

 

근대 들어와서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이 ‘신사참배를 종교행위가 아니다’라고 우회적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일부 강경한 사람들이 신사참배도 우상숭배라고 강력하게 반발함으로서 신사참배 문제가 1930년도 후반 한국 교회에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적 기관이 그 당시 다 해체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연합회, NCC도 해체가 되었고, 기독교서회 등등 개신교가 연합으로 하던 기관들이 당시에 일본총독부에 의해 해체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식교, 선길교회, 침례교 등 교단을 총독부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총독부와 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총독부에 협력하는 친일행동을 하면서 기독교는 살아남았습니다.

 

젊은 개신교 학자들이 세계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보면 “섬김”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돕는 역할을 사도들이 하다가 분쟁이 생기니까 그것을 주로 맡는 집사들을 제비를 뽑아서 임명했습니다. 사도들은 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유지해 나가는 일을 하면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일만 하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고 특별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 교회에서 보면 혼돈되어 있습니다.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을 디아꼬노스(diaconos), 집사라고 그랬습니다. 오늘의 집사라고 하면 교회 몇 번 나오면 집사를 시키고 그러지 않습니까? 해마다 선출합니다. 그것도 다음에 안 시키면 화나서 교회 안 나오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통을 교회가 살려서 계속 와야 하는데 개신교의 경우는 완전히 없어져버렸습니다.

 

성공회나 감리교 같은 경우는 목사가 안수받으면 감리교에서는 준목사라고 합니다. 성공회에서는 영어로 디컨(Deacon)이라고 합니다. 디컨(준목사)을 몇 년하고 정 목사가 되는 겁니다. 연회에 정회원이 됩니다. 진짜 안수를 받은 신부가 되면은 그 사람은 성공회에서는 엘다(elder or Presbyter)라고 부릅니다. 디컨이라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직책이 교권적 사역의 직책과 혼돈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디컨이라고 하는 초대교회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사회봉사라고 하는 것이 교회 본질의 하나인데 그 본질이 이젠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과외적인 것,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이런 성격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비판적 사람들의 글을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섬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종이 되어서 사람들을 섬긴다는 뜻도 있지만, 섬김이라는 뜻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가 그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과 내가 종이 되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긴다는 의미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섬김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예배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 기본적인 성서적 인식을 기독교가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상당히 공감 가는 주장입니다.

 

사회자:

아까 말씀하셨던 디아코니아, 즉 집사제도가 현대 교회로 오면서 역할이 혼란스럽게 변질된 측면이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나라 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인가요?

 

박상증 목사:

‘세계적인 교회의 현상이다’라고 보면 됩니다. 세계적으로 교회가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교권의 사역으로 변절되어 버린 것입니다..

 

박효종 교수:

지금 박 목사님이 지적해주신 문제는 가톨릭에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은 복음의 전파에만 전념하고, 고아나 과부를 보살피는 문제에서 불만이 생기자 전담하는 사람을 따로 뽑아서 직책을 맡긴 사람이 ‘디아코누스’입니다. 그런데 이 직분을 가톨릭에서도 영어로 ‘디콘(deacon)’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랑 비슷한데, 이 ‘디콘’이라고 하는 직분이 영속적이고 특별한 의미의 직책이 아니라 신부가 되기 이전의 잠정적인 신분, 즉 사제가 되기 전 1년 정도 기간의 ‘부제(副祭)’신분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봉사한다’는 원래의 본질적인 특성을 잊어버리고 교회제도의 하나의 역할로서 한정되어 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 교회의 사회역할을 이야기 할 때, ‘봉사’라고 하는 측면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과거 초대교회에서부터 내려온 하나의 중요한 전통입니다.

 

사실 이러한 측면과는 다르게, 사회참여를 일종의 정치참여라고 할 때, 즉 정치나 정책적인 문제에 있어, 혹은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 교회가 목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 ‘참여’라고 하면, 전통적인 봉사라는 것과는 의미가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도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국가적인 의례다”라고해서 넘어갔습니다. 지금 보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있어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반성하는 분위기가 가톨릭교회 내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사회참여,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그 참여를 ‘봉사’라고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참여를 ‘정치참여’라고 했을 때는 쟁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에도 그런 실례가 나옵니다. 바리세이파 율법학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시도가 그것입니다. 유대아가 식민지 국가지만 유대인들의 민족감정으로 보면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내야 문제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세금 문제를 질문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를 옭아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라”라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원칙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사회참여, 특히 정치참여가 쟁점이 될 때마다 엄숙하게 상기해야하는 원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자:

이제 본격적으로 종교가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민주화에 기여했던 부분에 대해 짚어 주셨으면 합니다.

 

박상증 목사:

제 기억으로 46년도에 중학교 졸업을 하고 그 당시에 일제 잔재로 남아있는 서울대학 예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졸업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학의 분위기는 국대안 반대, 데모만 하고 스트라이크하고 공부는 안했습니다. 예과 학교는 청량리에 있는데 내가 몇 번 안 갔어요. 예과 2년 후 졸업을 하고 본과를 동숭동으로 갔는데, 그 당시의 대학분위기는 완전 남로당이었습니다. 교회는 반공이었습니다만 우리같이 혼란스럽고 방황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교회가 아무런 도움도 못줬습니다. 결국 내가 나이가 들어가지고 에밀 부르나(Emil Brunner / 스위스 신학자)가 쓴 저서 ‘기독교 공산주의’ 이런 책들 찾아봤지 교회 안에서 젊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능력은 전무했다고 봅니다. 또한 공산주의자와 싸우는 것이 사회참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고, 또 대학에서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가야 지식인다운 것이라고 그 시대는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예과에서 13명이 본과로 올라갔습니다. 서양사학과에, 13명이 올라갔는데 지금 남아있는 사람이 저 혼자뿐입니다. 반 이상이 월북했거나 6.25 사변 때 죽었습니다. 저는 결국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목사 아들이라서 공산주의 서적은 읽어도 성분이 나쁜 놈이라서 안끼워 주더군요.

 

우리들의 민주화운동을 말한다면 결국은 군사독재, 유신 전 60년대 초부터 유신이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개신교 학생운동을 돌이켜보면 연구와 공부에 치중했습니다. 개신교 기독학생운동도 분열이 되었지만, 역사가 긴 YMCA와, YWCA가 있고, 주로 서울대학 사람들이 주축으로 만든 KSCM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세 단체가 될 수 있으면 같이 하자라는 분위기가 50년대부터 조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한국기독학생협의회를 조직하여 KSCC라고 정동에 있는 젠센센터(Jensen center)를 본부로 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독교 학생들이 하나로 되가는 운동과 그것을 지도하는 기독자교수협의회 같은 것을 만들어가면서 그것이 후에 기독교 안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주력이 되는 모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견을 하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 흐름에서 같이 성장을 한 것이죠. 특히 49년도 문리대 2학년인가 3학년 때에 미국으로 도망갔다가 신학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58년도에 돌아와 가지고 이화대학과 서울신학대학에서 강의하고 기독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민주화 운동이 서서히 퍼지게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참고하게된 것이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대한 저항, 그 저항운동을 지지하는 세계적인 네트워크 ANC의 연대활동, 그 안에서 신학자들의 공동체를 모색하는 모습들, 또 남미의 해방 신학자들, 미국에서의 말콤액스의 시민해방운동이나 마틴루터킹의 비폭력적 저항운동에 미국의 백인교회와 흑인교회가 협동을 해가면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 미국의 학생들이 미국 남부에 가서 흑인해방운동에 동참하는 모습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본따고 배우면서 우리의 전략을 세워갔던 겁니다.

 

박효종 교수:

가톨릭과 연결해서 말씀드리면, 특히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 해방공간에서 좌우익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톨릭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의 모든 신자들 사이에서 상징적 존재였던 장면 박사 같은 분은 아무리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야당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고 교회를 박해하는 이념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안 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거기에는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박해가 생생하게 작용했습니다. 특히 6?25때 개신교도 그랬지만, 가톨릭도 많은 성직자들이 끌려가서 순교했습니다. 또 ‘죽음의 행진’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가톨릭과 상생할 수 없는 ‘무신론’의 이념이었습니다. 그 후 가톨릭 내에는 독재에 반대하는 분위기도 상당부분 형성됐지만, “공산주의는 안 된다”는 원칙에는 단호했습니다.

 

1970년대 초ㆍ중반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지학순 주교의 입장이 일부 신부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얻으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구성됐고 민주화운동에서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톨릭 농민회, 가톨릭 노동운동도 아주 활발하게 반독재, 노동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엑티비스트(activist)’로서 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미의 해방신학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지요. 또한 통일민족주의도 가톨릭 민주화운동에서 상당히 친화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반독재 투쟁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됐지만, 분단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야한다는 점에서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분단이라는 민족적 문제에서 많은 모순들이 비롯되었다고 믿게 됐고,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공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기류와 움직임이 가톨릭내의 민주화 운동세력에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상증 목사:

제가 제네바에 있을 때,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백인 식민지 국가로부터 독립을 하려는 13개 소위 리버레이션 무브먼트(Liberation Movements)가 제네바에서 코디네이팅하는 팀에서 같이 그 사람들을 만나봤어요. 그 과정에서 상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이 모잠비크에 가톨릭 선교회인 화이트 파더(White Father)라고 하는 커뮤니티가 있었습니다. 그게 모잠비크와 앙골라는 포루투갈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식민지였습니다. 모잠비크에서 화이트 파더들이 자진해서 철수를 했습니다. 독재 정권하에서 선교를 못하겠다는 점에 대해 찬반여론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단호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독립운동하겠다고 하는 개신교 목사, 가톨릭 신부가 포르토리코 사람들 독립운동을 하는 일에 화이트 파더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니까 지역의 교장과 갈등이 생기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 점을 볼 때 바티칸 자체는 제가 제네바에 있으면서 김지하씨와 지학순주교님의 국내에서의 활동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동성명서를 한번 내자고 제가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에 WCC와 바티칸의 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68년도 웁사라 총회 WCC총회때는 제가 직원이었으니까 자세히 기억하는데 투치(Tucci)라고 하는 가톨릭 신부가 와서 ‘바티칸이 WCC 멤버가 될 수 있느냐’를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이분이 장황한 논제를 풀면서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만큼 로마하고 제네바의 왕래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근데 결국 안되었습니다. 왜 안 되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습니다.

 

 

박효종 교수:

당시 예를 들어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과 로마 교황청사이의 긴장간계를 보면 아무래도 “가톨릭은 보수적이다”라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수적’이라고 하는 부분은 교회의 정통적인 입장, 사회참여의 봉사의 분야에서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미의 해방신학이 로마 바티칸과 긴장관계를 형성한 이유도 보면, 지방교회가 사회해방, 민중해방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과 이슈로 내세우다보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남미에서는 가톨릭신부가 마르크시스트들과 함께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힘없는 노동자들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해소를 위해서 교회는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가톨릭이 힘있고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반성이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사실 지방교회의 특성을 가진 가톨릭이 로마 바티칸의 입장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어진 한국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민주화운동의 구도가 형성된 상황도 지방교회인 한국가톨릭이 직면하고 반응해야했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는 발언해야 한다”는 주장에 당시의 김수환 추기경도 아주 적극적으로 공감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운동의 큰 흐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동참해야한다는 입장이었죠. 즉 억압적 상황에서 교회의 정치참여와 같은 것은 정당화된다는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박상증 목사:

오래 전에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와 아시아카톨릭주교회의가 협의하여 사회활동가(social action group)들 주로 도시산업선교 활동가들을 공동으로 훈련시키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훈련장소를 필리핀으로 정하고 아시아 각국에서 많은 운동가들이 여기를 거쳐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책임자는 필린핀에 파송되었던 미국인 신부가 맡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제가 갔더니 50센트 내고 점심 먹는 빈민촌 판자집이 있었습니다. 거길 갔더니 자꾸 어떤 자리에 앉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데나 앉으면 어떠느냐?”라고 했더니 거기에 “김수환 추기경이 앉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 추기경은 한사람도 안 왔는데 당신나라 추기경이 와서 여기 와서 같이 점심을 잡수셨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야! 교회 지도자의 어떤 행동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구나” 거기서 제가 절실히 느꼈습니다.

 

제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2번을 만났는데, (WCC 일할 때) 서울 출장 와서 젊은 놈이 건방지게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NCC하고 추기경님이 어떻게 협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이 계속하시는 말씀이 “여기는 교회다. 거기는 교회가 아니지 않느냐? 거기는 협의체다. 우리는 교회와 상대하지 협의체와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두 번째는 제가 준비를 해가지고 갔습니다. "가톨릭 교권 속에 컨시리어리티(conciliarity)가 있는 것이 아니냐?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래서 교황도 애기할 때 I가 아니라 We라고 표현한다. 그걸 보더라도 가톨릭의 추기경이라고 하는 교권에 함축된 conciliarity가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흡족한 답은 없으시더군요. 그런 주장을 하시면서도 협력을 하셨습니다.

 

결국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그 다음의 문제가 북한하고의 관계입니다. 한국교회가 분열된 국가에서 기독교지도자가 취해야 할 목회적 책임에 대하여 충격적 경험을 한 것은 1965년 독일교회 지도자의 한국 공식 방문 때였습니다. 독일교회 고위층 지도자를 Berlin Brandenbrug의 주교인 Shaff 감독이 독일교회의장의 자격으로 내한했습니다. 점령지역 서 Berlin과 동 Berlin과 동독지역의 교구장으로서 서독 정부의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 서 Berlin 신분증을 소지하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의 군사정부의 당황한 모습, 우리들의 두려움, 결국 입국했고 한독교회관계는 이런 문제를 안고 진행되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며 경제원조를 받게 되고 다수의 유학생도 독일에 갔습니다. 그리고 간호사와 광부를 위한 목회자도 파송했습니다. 소국의 정치 소용돌이 민주화운동 이런 역사의 흐름이 독일 내 한국인에게 분명 영향을 주었습니다. 해외에서의 저항운동 더 나가서 지원활동을 위한 조직활동이라는 측면에서 결국 해외운동도 선통일 선민주의 레토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남한 역대 정권의 대북공작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북한의 치열한 대남 공작의 현장은 대단했습니다.

 

저 자신과 친구들은 분열된 해외 민주화운동을 구태여 통합한다는 희망가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경직된 남한의 기독교 운동 속에서 평화적 통일의 실체가 무엇일까 그리고 민주화운동과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오래 토론했습니다. 그 결과 1984년에 동북아의 평화를 주제로 남북통일에 관한 토의를 국제회의의 틀 속에서 처음으로 일본 YMCA의 동산장(東山裝)에서 한국 교회 지도자가 참석한 가운데 시도했습니다. 그후 여론이 조성되는 것을 보고 WCC 책임간사들이 어렵게 어렵게 평양 정부의 합의를 얻어 기독교도연맹과 정식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86년도에 글리온 회의를 시작해서 몇 번했고, 그 다음에 기독교도연맹 사람들이 일본가고, 미국가고, 독일가고, WCC 회의에도 오고 이런 관계가 맺어졌던 겁니다. 그러면 20년 동안 내가 지켜보면서 우리들의 상호 대화라는 것이 어느 심층적인 곳까지 갔는지에 대한 자책적인 불만이 생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나기만 하면 뭐하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자:

종교의 사회참여 문제가 오늘날 다시 현안이 되고 있습니다. 4대강 문제나 북한 인권문제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다양한 종교가 개별적으로, 때론 교단을 단위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종교인의 참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특히 최근의 이슈와 관련해서 종교의 사회 참여 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상증 목사 :

4대강 문제도 보면, 4대강 문제라기보다 대정권 투쟁같이 보입니다. 4대강 이슈로서 토론했으면 좋겠는데 정권 심판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에 대한 종교계의 참여라는 것을 '좀 더 선별적으로 해야 될 것 같다'라고 생각합니다. 정권 타도가 목적이 아니잖습니까. 옛날 군사정권이고 유신체제라면 또 다른데 합법적으론 어느 정도 민주화되어가는 과정에서 큰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봤을 때 프로세스입니다. 프로세스 속에서 야당도 있고 여당도 있고 하는 것인데 교회라고 하는 것이 정당정치에 휘말려 들어가지고 어느 한편에 선다 하는 그런 입장은 내가 봤을 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4대강 문제도 반대 발언은 많이 들었습니다. 찬성 발언은 한 번도 못 들었습니다.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4대강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만큼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민들에게 해로운 것이냐 하는 것을 정말 정확하게 해주려는 노력은 없고, 내가 은평구에 사는데 이번에도 보니까 정권심판이더군요. 그런데 “정권심판은 좋은데 은평구에서는 무엇을 할 꺼냐?”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NCC가 그렇고, 가톨릭 신부가 그렇고, 불교가 특히 강하게 반대하는 것을 볼 때 내가 동참하기 어려운 운동같은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사회자:

그러나 정권타도를 액면에 내세우지는 않지요. 환경이나 생명문제를 중심 이슈로 삼아 논리를 전개합니다.

 

박상증 목사:

그런데 생명도 김지하는 다른 차원에서 하잖습니까?. 생명도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이루려는 생동감과 시민을 감동시키는 비젼(Vision)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정부 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유신시대의 저항과 선별해서 우리가 식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정부 반대하는 것이 시민의 역할이다 하는 주장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와서 그걸 느낍니다. 내가 예전에 몇 번 행사가 있어서 영산강에 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영산강이라고 하는 강이 옛날에 큰 강인줄 몰랐습니다. 전남 나주에 있는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건 김대중 때부터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다리 건너가는 곳에 등대가 있더군요. 아주 흙에 파뭍혀 있는 등대가 뭔가 했더니 ‘옛날에 포구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산강을 살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사도 좋다고 하고, 시장도 좋다고 하는데 왜 민주당은 반대합니까? 그러면 4대강 문제도 영산강을 빼고 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볼 때 영산강을 2번 가보고나서 느낌이 있는데, 4대강 떠드는 사람을 동조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영산강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지요. 정권심판론은 내가 봤을 때 교회가 지양해야 될 성격이 좀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도 오늘 중앙일보 보니까 김상근 등등이 미국 가서 역설을 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그들이 가서 애기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내가 미국에서 민주화운동 할 때 같이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사람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친북파이니까요. 교민들 돈 모아서 이북에 보내주고 왔다갔다 하는 역할은 그것까진 좋지만 그 사람들하고 같이 일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김정일하고는 친한데 소위 보수정당 이명박 정권은 타도해야 할 정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 식인 시민운동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동승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참여라고 하는 것은 NCC가 반대하고, 가톨릭 신부들이 반대하고, 주교회의가 반대하고, 불교도 반대하는데 박상증 목사가 '니가 뭐가 잘났다고 혼자 떠드느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잘난 건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 저는 비판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개신교에서 한기총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한기총은 나같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봅니다. 그러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한국의 NCC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난 그런 입장입니다.

 

박효종 교수:

저는 교회라고 하는 조직도 ‘에끌레시아(ekklesia)’, 특히 그리스 시대부터 ‘에끌레시아’라고 불린 전통을 존중하며 비교적 충실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시대에 ‘에끌레시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민회(民會)’를 의미했어요. 그 후 교회도 ‘에끌레시아’라고 불렸고 그 용어를 쓰는 라틴어도 그리스말과 똑 같아요. 그것은 한마디로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라는 것이지요. 저는 교회에 있는 신자건 성직자건 얼마든지 개인적인 의견과 생각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신앙과 교리에 관한 문제가 아닌 한에 있어서는 말이죠.

 

그런데 예를 들어 4대강 이슈에 대해서 반대하는 가톨릭 주교회의 성명서의 논리를 보면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반한다는 그런 식의 흐름으로 되어있어요. 물론 가톨릭이라는 교회도 사회적인 이슈나 윤리적인 이슈에 대해 충분히 발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회가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입장표명, 예를 들면 “낙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생명존중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충분히 공감이 가요. 그런데 4대강 이슈와 같은 것들을 어떻게 신앙적인 이슈나 윤리적인 이슈로 볼 수 있겠어요? 이런 문제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문제고 또 과학적인 이슈인데, 따지고 보면 세속적인 이슈라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이슈라면 교회의 구성원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지금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개인들에게 제공하쟎어요? 이처럼 얼마든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데도 굳이 ‘교회’, 즉 ‘에끌레시아’라고 하는 전체의 이름으로 가타부타 얘기를 한다는 것은 과거 가톨릭이 권위주의 시대에 인권을 위해서 발언을 했던 것과는 맥락이 정말 다르다고 봅니다.

 

가톨릭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환경주의자’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개발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환경운동의 환경을 어떻게 규정해야 되는지도 쟁점이며, 생명문제라고 하더라도 생명존중이라고 볼 수 있는 시각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범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4대강 이슈를 가지고 가톨릭의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반대다”라고 지적하는 사실 자체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원칙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억압의 시대도 아니고 자유롭게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민주사회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선호, 비(非)선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4대강에 대해서 교회가 그토록 생명존중과 결부시켜 신앙의 문제와 연결된 것처럼 공식적으로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교회’라고 이야기할 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금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 짜다는 것 아닙니까? 소금이 설탕처럼 된다면, 아예 실체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적절한 상황에서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인권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교회가 발언해야지요.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반공이냐 친북이냐 민족주의냐, 이런 것을 떠나 종교인들이 발언해야할 사회적 문제지요. 북한의 주민들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고 목숨을 걸고 탈북한 수많은 탈북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증언하는데, 이런 참혹한 주민들의 상황에 대해 침묵하면서 북한인권이 개선되길 기다리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공개적으로 인권문제를 거론해야하고 교회도 북한인권에 대해서 강력하게 관심을 표명해야 합니다.

 

유엔도 북한인권에 대해서 결의안을 내는 상황인데, 가톨릭교회,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의 행동을 보면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목소리를 높여왔는데 비해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서는 한마디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주교회의는 어떤가요. 저는 주교회의라고 해서 4대강 이슈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발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인권이라든지 북한의 국군포로들, 그런 문제도 당연히 생명존중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이슈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안 한다면, 편향된 태도가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고 목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분별력있게’ 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라든지 윤리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발 벗고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4대강 이슈가 그런 문제인가요? 그럼에도 4대강을 반대하기 위해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단식까지 하는 신부도 생기는 상황이라면, 북한인권에 대해서도 단식하는 신부가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 못하다면 균형 감각이 부족한 교회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회의 사회참여는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친북민족주의적인 입장은 성역으로 생각하여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눈감고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발언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모습이지요. 북한은 유례없는 반인권적 억압정책을 써서 주민을 핍박해도 자신의 편향된 민족주의적 성향에 따라 침묵하는 한편, “이명박 정권은 맘에 안 든다 그러니 4대강 반대 기치를 들고 나서겠다”라는 태도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양심’에 부합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위안을 주는 메시지를 전해줘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사회가 아닙니까. ‘짝퉁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라는 말입니다. 물론 '법을 빙자한 권위주의체제가 아니냐?' 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완전한 민주주의’, 즉 ‘풀 데모크라시(full democracy)’라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고 소통의 채널이 열려있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이슈에 대해서 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번 용산참사문제에 대해서 교회나 주교회의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법치에 부담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철거민들의 아픔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4대강 문제는 다릅니다. 저도 교회에 가서 이런 말을 들을 때 황당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6일 동안 세속에 살면서 찌든 삶이라 생각하는데, 교회에 까지 가서 “4대강은 안 된다”라고 하는 성직자들의 열성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왜 하필 교회에 가서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가 하는 느낌 때문이지요. 모름지기 교회의 주체가 되는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이런 느낌과 생각을 감안해서 세속적인 이슈냐, 신앙적인 이슈냐 하는 문제를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상증 목사: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그 운동을 어떻게 자체 평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나는 촛불이 반미 반정부행동의 상징이 되는 것에 어떤 모순을 봅니다. 말없이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빛을 비치는 희생의 상징인 촛불이 저항과 부정의 상징이 되는 것을 두 번 봤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사건 광우병 걸린 고기를 반성없이 국민에게 먹이는 정부라는 선동! 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내가 소년기에 겪었던 남한단독정부 부정을 앞세우며 북한정부수립을 위한 비밀선거에 동참을 강요하던 세력과 촛불시위에 비추어진 소위 선거부정의 정서에 어떤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쟁과 평화를 선거전에 이용하는 데마고그적인 전략도 Populist의 Propaganda로 보는 것은 단지 내가 나이 먹고 역사현실을 분명히 보지 못할 만큼 노쇠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역사는 큰 하나의 Process고 그 프로세스를 완벽하게 설명하려는 이념이나 사상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에큐메니컬 운동과 시민운동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마 그래도 실패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자:

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탁견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초에 로마의 정교일치에서 시작해서 정교분리로 사회와 종교의 역할관계가 정립된 과정,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교회가 해온 역할, 4대강 사업이나 촛불시위 등 현안과 관련된 종교의 사회참여 이슈에 대한 바람직한 시각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또 4대강, 광우병 촛불시위 등 최근의 이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핵심적으로 정리를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 종교의 사회참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요즘에 종교의 사회참여가 지향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중요한 사항을 짚어주시고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입력날짜 : 2010-12-14 (12:30), 조회수 : 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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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균 우리가 바라는 사제상은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 입니다.
  2011-01-18 오후 2: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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