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을 기리며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빛의 시기인 대림시기에 절망과 고통을 느끼며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영적 공허(空虛)를 느끼며 진정 하느님이 존재하시는가 하는 의혹과 불신으로 밤을 샌다면 그것이 바로 ‘영혼의 밤’입니다.
영혼의 어둔 밤은 16세기 갈멜 수도원의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이 쓴 책 제목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부패한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로서 ‘어둔 밤’, ‘가르멜의 산길’ 등 영성신학의 위대한 고전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하여 애썼으나, 1577년 12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아빌라의 육화의 수녀원에서 가르멜 수도회 수도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얼굴에 두건이 씌워진 채 끌려가 9개월간 똘레도 수도원의 다락방에 갇힙니다. 그는 독방에 갇혔으며 벽 틈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가느다란 빛줄기를 제외하고는 온통 어둠 속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영혼의 밤’을 겪게 되며, 이는 분명 십자가의 요한에게는 고통과 저주의 밤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자신과 같이 살았던 수도자들이 수도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이토록 자신을 박해할 수 있단 말인가?’ 등의 수많은 질문과 함께 수백, 수천 번을 되새겨본 밤이었을 것입니다. 이때의 경험과 묵상을 바탕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어두운 밤은 십자가의 요한에게 분명 부정과 박탈(剝奪)의 동의어였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밤, 어둔 밤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어두운 밤에,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을 맛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 밤이 없었다면 과연 기나긴 고통의 터널에서 영혼의 정화(淨化)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라고 회상합니다. 그는 이 밤들이 있었기에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맛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둔 밤’ 54쪽~55쪽)
욥 성인은 사탄의 간계(奸計)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서 앉아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게 됩니다. (욥기 3,1-5) 그러나 욥은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끝내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욥 성인은 하느님은 초월자로서 인과응보(因果應報)나 상선벌악(賞善罰惡), 즉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영혼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이후 하느님께서 전에 소유하였던 것을 갑절로 더해주셨으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엔도 슈삭쿠의 소설 ‘침묵’에서 도꾸가와 막부 시절 나가사키에서 선교하던 로드리게스 신부는 고문으로 죽어가는 신자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절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합니다. 그는 이 어둔 밤을 이겨내지 못하며, 배교의 표시로 성화(聖畫)를 밟는 후미에(踏繪)를 합니다. 그는 그리고 하느님에게 묻습니다.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에서 당신께 울부짖을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하느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그때 너와 같이 있었다. 너와 같이 아파하고 고뇌하고 울며 어두운 밤을 너와 같이 지새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영혼의 밤을 지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수난 전날 피땀 흘리며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에게서 비켜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마태오 26,39) 예수님은 영혼의 밤을 지내신 후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로써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贖良)하셨으며 자신을 못 박은 병사들의 용서를 성부(聖父)께 청함으로써 천주 성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부활하셨습니다.
월남의 주교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1975년 월남이 적화되고 얼마 안 있어 성모승천 축일에 공산당원에게 붙잡혀 영어(囹圄)의 몸이 됩니다. 그는 13년을 감옥에서 지냈고 그중에서 9년을 독방에서 지냈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감옥에서 저주와 분노, 회한과 자책으로 참으로 어두운 밤을 지냈을 것입니다. 수많은 날과 달안에서 수많은 감정, 곧 서글픔과 두려움과 긴장이 그의 정신을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수많은 밤을 보내면서 성덕(聖德)에 이르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길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확신에서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 이제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면서 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75쪽)
그는 그 어려운 순간을 사랑으로 승화시켰으며, 순간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13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1988년 석방되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구엔 반 투안 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에 의하여 ‘간추린 사회교리’를 집대성하고 2001년 추기경으로 서품된 후 이듬해 2002년 선종하였습니다. 후일 구엔 반 투안 주교는 2007년 11월 선포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고독한 밤을 이겨낸 희망의 증인’으로 칭송받았습니다.
대림시기 첫날입니다. 그러나 희망과 빛, 생명의 시기에 거꾸로 절망과 어둠,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둠과 절망뿐, 어디에도 희망을 찾을 수 없으며 하느님은 그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나를 맡기고 이 ‘영혼의 밤’을 이겨 내어야 마침내 주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심으로써 우리를 더욱 깊은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하느님 부재의 체험은 욥 성인의 경우처럼 하느님 현존의 또 다른 자각이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바의 실현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Faith is the realization of what is hoped for and evidence of what is unseen)” 우리가 바라는 주님의 강생은 우리의 확실한 믿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비록 끊임없이 의심과 의혹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하여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 때 ‘영혼의 밤’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이며, 우리는 더욱 높은 곳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2021. 11. 28. 대림시기 첫날에)































